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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하는 공포

By on 1월 12, 2015 in Something | 0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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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하건대, 유동적 근대의 모든 승리는 일시적이다. 그 승리가 가져오는 안전은 기껏해야 지금 힘의 균형이 유리하게 형성되었다는 의미일 뿐이며, 균형이란 언제나 오래가기 어려운 법이다. 마치 움직이는 물체를 찍은 스냅사진처럼, 오래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법이다. 위험은 흙 속에 엎드려 있지만, 진정으로 굴복한 것은 아니고 언제까지나 굴복시킬 수도 없다. 그리고 덧없는 안전감이 기대는 유일한 근거인 힘의 균형은 매일처럼 확인될 필요가 있다.그래야만 아주 작은 변동의 조짐이라도 때맞춰 포착하고, 가능하면, 차단할 수 있을 테니까.

<지그문트 바우만 / 유동하는 공포, 1_죽음의 공포 85>

 

가장 파급력이 있으며 어쩌면 가장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결과는 현대의 ‘신뢰성 위기’다. 악이 도처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 악인은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뚜렷이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두드러진 특징도 없고, 별도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지금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사실은 악의 군단의 예비군으로서 언제든 그 군대에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그런 시각은 대체로 과장이라 하겠다. 분명 모든 사람이 악의 종자로서 일할 수 있지는 않고, 일하려 하지도 않는다. … 하지만 누가 그런 사람인지, 또 누가 그렇지 않은 사람, 즉 악의 계략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다는게 요점이다.

<같은 책, 2_악과 공포 93>

 

당시 욥이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는 것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신처럼 전능하다고 뽐내는 자들 역시 자신의 무기를 가장 무시무시하고, 악랄하고, 강력하게 만들려면 그것을 예측 불능으로, 되는 대로 내리쳐야 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배자의 벼락을 빼앗으려는 자는 먼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불확실성의 안개를 걷어내야 하며, 그 불규칙성에서 규칙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도. 그러나 당시 욥은 그것까지 내다보지는 못했다. 그는 근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같은 책, 2_악과 공포 100>

 

근대적 이성은 독점을 형성하고 권리의 배타성을 확보하는 데 특히 발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유리한 특권이 있을 때 그 특권에 따라 움직이는 규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작용했다. 그런 특건을 안전히 보장하려는 목적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준칙이 적용되거나 제시되어 그들과 다른 류의 사람들을 배제하는데 쓰일 경우-그런 사람들이 무능하다거나 무가치하다거나 하는 관념을 빌미로, 그 밖에 편리하게 써먹을 수는 있지만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고 논쟁을 허용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를 끌어다 붙이며,- 근대적 이성은 별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지 않다. 단지 적절히 고립되어 있고 철저히 외면받고 이는 소수의 강단 철학자들만이 불만을 토로할 뿐. 또한 ‘어떤 사람들은 괴로움을 당해도 괜찮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가능성을 줄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외부에서, 때로는 내부에서 들릴 경우에도 이성은 저항하지 않았다. 즉 ‘우리’가 어떻게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희생하면 덜 불편하게 되는 입장에 있다면, 그런 희생에 대해 우리의 이성은 반대하지 않았다.

<같은 책, 2_악과 공포 110>

 

아우슈비츠나 굴락, 히로시마의 도덕적 교훈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 것을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책, 2_악과 공포 112>

 

유동적 근대를 살며,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관계를 갈망한다.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오히려 불안만 양산하고 있지만 말이다. 의심을 거둘 수 없고, 상대가 혹 배신할까봐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더 넓은 친구와 동지 관계의 네트워크 형성에 급급해한다. 저마다 휴대폰의 주소록에 갈수록 더 많은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려 하기에, 휴대폰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전보다 커진 주소록 공간을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저마다 배신에 대비해 ‘양다리를 걸치는’ 수법으로 리스크를 줄이려 하는데, 그것은 결국 리스크를 더욱 키우며 배신을 평범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나의 바구니로는 안심이 안되기 때문에, 새 바구니가 보일 때마다 달걀을 나눠 담으려 애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같은 책, 2_악과공포 118>

 

실존적 전율에 대한 국가적 방어책이 곧 철폐될 전망이고, 집단적인 방어장치들-가령 노동조합 등 집단협상을 위한 수단-도 약자의 연대를 침식해 들어오는 경쟁 시장의 압력에 굴복할 것으로 보이므로, 이제 개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위해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수단을 찾고, 실행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개인이, 개인에 의해, 개인을 위해 해야만 한다. 수단이라고는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운용하는 수단뿐인데,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턱없이 함량 미달인 수단이다. 이미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이 고조된 환경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더 많은 유연성을 주문하는 정치권의 메시지는 더 많은 도전과 더 큰 ‘사회문제의 개인화’가 초래된다는 점, 궁극적으로 더 심각한 불확실성이 찾아오리라는 점을 호도하는 것이다. 정치가들은 실존적 전율에 대한 집단적 대응 가능성을 철저히 외면하며, 그 대신 갈수록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해지는, 또 잠재적 위협이 커져만 가는 세계에서 개인의 안전에 주력하라고 부추긴다.

<같은 책, 5_유동적 공포 2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