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본의 17가지 모순

생산과 실현 간의 모순에 다리를 놓는 두 번째 방법은 가격을 터무니없이 올리거나, 노동계급에게 수수료/지대/세금을 부과하여 재량소득과 생활수준을 상당히 하락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이 손에 넣은 잉여분을 다만 얼마라도 빼앗는 것이다. 이는 사회임금을 조작하여 연금권, 교육 및 의료공급, 기본적인 서비스에서 얻은 성과들이 탈취에 의한 축적이라는 정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퇴행하는 과정에서도 가능하다. 오늘날 국가가 긴축의 정치에 폭넓게 호소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생산의 지점에서 자본은 노동자의 요구에 밀리거나 양보할 수도 있지만 생활공간에서 노동자의 주머니를 털어 양보하거나 잃었던 것(그리고 그 이상)을 되찾을 수 있다. 수많은 약탈적인 관행, 임의적이고 역진적인 세금, 과도한 법무 수수료 등 때문에 크게 골머리를 앓지 않더라도 이미 취약한 인구계층에게는 높은 지대와 주택비용, 신용카드회사/은행/전화회사의 과다청구, 의료와 교육의 사유화, 사용자 수수료와 벌금의 징수 등이 모두 힘겨운 재정적 부담이다.

<데이비드 하비 – 자본의 17가지 모순, 일곱번째 모순: 생산과 실현의 모순적 통합 p.143>

 

개별 이익을 추구하는 은행가들이 일반 복지에 기여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졌고, 미국에서는 연방준비은행이 민중이 아닌 은행들을 구제해 주었다. 이로써 이제 독점권력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지대 추구’에서 비롯된 시스템상의 문제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쁘게 말하면 부자가 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부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부를 빼앗는 것이다. 전자는 사회에 이롭지만 후자는 해가 되는데, 부를 빼앗는 과정에서 부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대 추구는 내가 말하는 ‘탈취에 의한 축적’을 예의 바르고 다소 중립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같은 책, 열 번째 모순: 독점과 경쟁- 집중과 분산 p.205>

 

일부 집단에서는 자본주의가 무시무시한 환경위기라는 형태의 치명적인 모순에 직면했다는 생각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이 주장이 그럴싸하긴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의 기하급수적인 성장 떄문에 환경에 대한 압력이 누적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주장은 대체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크게 네 가지 이유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자본은 오랜 역사 동안 생태적 난국을 성공적으로 헤쳐왔다. …자본의 역사를 거치는 내내 너무나도 많은 절망의 예언가들이 아직 무르익지도 않았을 때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쓸데없이 자주 “늑대야”라고 소리쳤다. … 둘째, 우리가 소위 착취하고 고갈시키고 있는 ‘자연’, 이 떄문에 우리를 구속하고 심지어는 ‘복수를 한다’고까지 여기는 ‘자연’은 사실상 자본순환과 자본축적에 내부화되어 있다. 가령 식물의 성장 능력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형 농업에 통합되어 있기 떄문에 이 이윤을 재투자해야만 이 식물은 그 다음해에도 다시 성장할 수 있다. … 세 번째 지점은 자본이 환경 문제를 큰 사업 영역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환경기술은 요즘 세계주식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된다. …앨 고어가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실천을 모색하다가 결국 환경운동에 남긴 큰 선물은 새로운 탄소거래시장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이 탄소거래시장은 헤지펀드가 투기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거대한 공급지가 되었을 뿐 전 세계 총탄소배출량을 억제하는 데는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 넷째, 어쩌면 가장 불편할지도 모르는 지점인데, 자본은 환경 재난이 한창일 떄도 완벽하게 꾸준히 순환하고 축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책, 열여섯 번째 모순: 자본과 자연의 관계 p.360-362>

 

중요한 것은 자본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 때문에 인구 다수가 극악무도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디스토피아라고 해도 아직은 이쪽에서 찔끔찔끔 무인기 공격을 감행하고 저쪽에서 정신 나간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국민을 상대로 가끔씩 독가스를 사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환경파괴와 대량 기아 사태에 대한 저항의 모든 형태에 전혀 일관성 없는 살인적 정책을 시행하는 경우가 가끔 있긴 하지만, 아직은 세상 어디를 가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없는 재앙에 가까운 전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도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부자와 빈자가 맞붙고 특권을 가진 자본가들과 비겁한 졸자들이 나머지 전체와 맞붙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다는 것만도 희망이라면 희망인 것이다. 바라건대 사회/정치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 생존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을 바꿔 놓을지도 모른다.

<같은 책, 열일곱 번째 모순: 인간본성의 반란 – 보편적인 소외, p.384>

 

자본을 실현하는 데 무제한적으로 극대화된 효율성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제한적으로 극대화된 비효율성과 무제한적으로 극대화된 낭비적 소비를 불러왔다. 필요, 바람, 욕구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이전에 사용하던 것과 사용가치가 동일하거나 더 적지만 값이 더 비싼 상품에 대한 욕구를 만들어 내야 했다.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필요의 긴박함에는 바람이 덧씌워져야 했다. 간단히 말해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소비자를 창출하고, 수요를 만들어 내야 했다. 이를 위해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더라도 혁신과 노후화의 속도를 올리고 극심한 불평등을 재생산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희소성을 부단히 재생산해야 했다.

<앙드레 고르 – Critique of Economic Reason, p.22>

 

계몽된 휴머니즘의 전통이 아직 생생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시 인기를 얻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신호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이들의 삶의 기회와 전망을 향상시킨다는 사명을 앞세운 비정부기구나 자선기관에 몸담고 있는 것은 분명 휴머니즘의 발로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본에 휴머니즘의 옷을 입히려는 헛된 시도마저 진행 중이다. 일부 기업가들은 이를 깨어 있는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양심세탁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기업주의 윤리의 일종이다. 그 자매품으로는 기업가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는 수준까지만 노동자 효율성을 향상시키자는 솔깃한 제안이 있다.

<데이비드 하비 – 자본의 17가지 모순, 결론: 행복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미래를 위하여, p.411>

 

전 세계 대중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확한 표현대로 “무관심의 세계화”에 맞서, 파농의 재치 있는 표현처럼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을 하면서, 무책임한 잠자는 숲속의 공주 놀이를 중단”해야 한다. 만약 잠자는 공주가 때맞춰 일어난다면 우리의 미래는 동화 속 결말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그람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사의 절대적인 휴머니즘은 역사와 사회에 존재하는 기존 모순들의 평화로운 해결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는 다만 이런 모순들을 다루는 이론일 뿐이다.” 희망은 그 안에 숨어 있다고 브레히트는 말했다.

<같은 책, 결론: 행복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미래를 위하여, p.4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