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시장은 이 말이 갖는 지극히 일반적인 의미에서, 요컨대 중세, 16세기, 17세기에 일반적으로 작동하던 시장은 한마디로 말해 본질적으로 정의의 공간이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 정의의 공간일까요? 여러 의미에서 그러합니다. 우선 시장은 극도로 다수의 엄밀한 규제들로 에워싸인 공간이었습니다. 요컨대 그것은 시장에 가져올 수 있는 물품들과 관련된 규제, 이 물품들의 제조방식과 관련된 규제, 이 상품들의 원산지와 관련된 규제, 지불해야 할 세금과 관련된 규제, 판매절차와 관련된 규제, 그리고 물론 고정가격과 관련된 규제였습니다. 그러므로 시장은 규제로 에워싸인 공간이었습니다. 또 실천가들이나 이론가들 모두 시장에서 확정된 판매가격을 공정가격 혹은 아무튼 공정가격이어야 하는 가격으로 간주한다는 의미에서도 시장은 정의의 공간입니다. 다시 말해 이 공정가격이란 수행된 노동, 상품의 필요, 소비자들의 필요 및 가능성과 일정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던 것입니다.

<미셸푸코, 생명관리정치의 탄생, p.57>

 

대략적으로 말씀드리면, 주권이라는 낡은 정치체계 내에서 주권자와 신민들 간에는 주권자에게 신민을 보호하도록 책임지우고 강제하기까지 하는 일련의 사법적/경제적 관계가 존재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보호는 외적인 것이었습니다. 신민은 자신의 주권자에게 외부 또는 내부의 적으로부터 보호해줄 것을 요구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주의의 경우, 상황은 완전히 다릅니다. 확보되어야 하는 것은 이제 단지 그런 종류의 개인에 대한 외적 보호가 아닙니다. 자유주의는 어떤 메커니즘의 내부에 들어가서, 거기서 위험이라는 이 개념을 중심으로 개인의 자유와 안전을 매 순간 조정해야만 하게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렸듯이, 한편으로 자유주의가 근본적으로 이해관계를 조작하는 통치기술이라면, 이것은 동전의 이면 같은 것인데, 다른 한편으로 자유주의가 이해관계를 다룰 수 있기 위해서는 반드시 위험을 관리하는 동시에 안전과 자유에 입각해 성립된 메커니즘까지 관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같은책, p. 103>

 

달리 말하면 이 자유주의 체제의 지지가 사법적 정당성 이외에도 과잉 생산물로서의 항구적인 합의를 생산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경제제도로부터 국가에 이르게 되는 계보와 대칭을 이루며 경제제도로부터 체제 및 체계에 대한 인구의 포괄적 지지에 이르게 되는 회로를 생산하게 되는 것, 바로 이것이 경제성장이며 그 경제성장에 의한 복지의 생산인 것입니다.

<같은책, p.130>

 

질서자유주의는 사회적 개입주의를 수반하는 경쟁적 시장경제를 기획합니다. 이 사회적 개입주의는 그 자체로 ‘기업’이라는 단위를 근본적 경제 주체로 재평가 하는 것을 중심으로 하는 제도적 혁신을 함축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볼 수 있는 것은 단순히 자본주의의 실제적 위기에 관한 이데올로기, 경제 이론, 정치적 선택에서의 단순한 결과와 기획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여기서 보게 되는 것은 아마도 짧거나 약간 긴 기간 동안 일어난 통치술, 또는 아무튼 자유주의 통치술의 혁신 같은 어떤 것의 탄생이었습니다. 이 통치술의 특징, 그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관건에 관해서는 이것들을 슘페터와 대비시켜봄으로써 파악할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 슘페터는 질서자유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그리고 질서자유주의자들은 베버와 마찬가지로, 맑스 또는 아무튼 맑스주의자들이 자본주의 사회의 절대적이고 근본적인 기원을 자본과 그 축적의 모순적 논리 내에서 찾는 것은 잘못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슘페터와 질서자유주의자들은 자본과 그 축적의 논리에는 내적 모순이 없으며 결과적으로 순수한 경제적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는 완벽하게 지속가능하다고 여깁니다. 이것이 바로 대체적으로 슘페터와 질서자유주의자들에게 공통된 테제의 총체입니다.

<같은책, p.258>

 

슘페터가 보기에 자본주의는 이런 집중을 피할 수가 없습니다. 즉 자본주의의 발전 내부 자체에서 일종의 사회주의로의 이행이 불가피하게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슘페터는 사회주의를 “중앙관청이 생산수단과 생산 자체를 관리할 수 있게 되는 체계”라고 정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사회주의로의 이행은 자본주의의 역사적 필연성에 편입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자본주의 경제에 고유한 비논리성 혹은 비합리성에 의한 것은 아니며 경쟁시장에 의해 야기된 조직적이고 사회적인 필연성에 의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같은책, p.259>

 

신자유주의자들이 다시 취하는 것은 바로 이 혁신의 문제, 그러므로 결국 이윤의 경향적 저하라는 문제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이 문제를 자본주의의 윤리적/심리학적 문제, 혹은 슘페터처럼 막스 베버와 그리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자본주의의 윤리적/경제적/심리적 문제로 다시 취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혁신의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이 혁신의 문제에 주의를 집중시키고, 말하자면 자본주의의 굳건함이나 경쟁의 항구적인 자극을 신뢰할 수는 없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혁신이 있다면, 다시 말해 새로운 것을 발견한다면, 생산성의 새로운 형식을 발견한다면, 기술적 유형의 혁신을 이룩한다면, 그것은 일정한 자본, 즉 인적자본의 소득, 다시 말해 인간의 수준에서 행해진 투자 총체의 소득에 다름 아니라는 것입니다. 신자유주의자들은 좀 더 총괄적인 인적자본 이론 내에서 혁신의 문제를 다시 취하고, 1930년대 이래의 서구 경제사와 일본경제사를 재검토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국가들이 최근 40~50년간 이뤄낸 엄청난 성장은 고전적 분석의 가변항, 다시 말해 토지, 자본, 노동시간으로 이해되는 노동, 즉 노동자와 노동시간의 수요[수량]로 이해되는 노동에 입각해서 결코 설명될 수 없음을 보여주려고 했죠. 인적 자본의 구성, 인적자본이 증가하는 방식, 인적자본이 증가된 영역, 투자의 자격으로 인적자본에 유입된 요소 등에 대한 섬세한 분석만이 오로지 이 국가들의 성장을 설명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같은책, p.330>

 

..한편으로는 ‘기업’의 형식을 사회체나 사회조직 내에서 실제적으로 일반화시키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회체를 재검토해 그것이 개인의 단위가 아니라 기업 단위에 따라 분배/분산/파급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을 의미합니다. 개인의 삶은 사회 혹은 극단적으로는 국가 같은 대기업의 틀 내부에 개별적 삶으로서 기입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혼합되어 착종된 다수의 다양한 기업의 틀 내에 기입되도록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기업들은 개인의 수중에 있어야 하고, 또 개인들의 행위/결정/선택이 의미를 가질 수 있을 만큼 그 크기가 제한적이며, 그가 단 하나의 기업에 종속되지 않을 마늠 충분히 숫자가 많아야 합니다. 결국 자신의 사유재산, 가족, 부부생활, 보험, 퇴직 등과 관련해 개인의 삶 자체가 자신에게 일종의 항구적인 기업, 다수의 기업이 되도록 해야만 합니다. 따라서 이는 기업, 기업들, 가장 미세한 단위의 기업 모델에 따라 사회를 재형식화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독일 질서자유주의자들의 사회정책이 갖는 측면 중 하나입니다.

<같은책, p.335>

 

그런데 이런 ‘기업’형식의 일반화는 어떤 기능을 할까요? 물론 한편으로 경제 모델, 수요와 공급의 모델, 투자-비용-이윤의 모델을 증가시켜 이것들이 사회의 모델, 심지어는 실존의 모델, 개인이 자기 자신, 자신의 시간, 자신의 이웃, 자신의 미래, 자신이 속한 단체, 자신의 가족과 맺는 관계의 형식이 되게 만드는 것이 문제입니다. 따라서 먼저 이 모델을 확산시켜야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 이렇게 기업을 보편적으로 일반화된 사회 모델로 만들려는 질서자유주의자들의 구상은 자신들의 분석과 계획화 내에서 자신들이 일련의 도덕적/문화적 가치의 회복이라고 지시하는 바에 근간으로 이용됩니다. … 질서자유주의자들의 시대에 유행하던 고전적 용어를 사용해 말한다면 이 기업의 도식과 함께 수행해야 할 중요한 것은 개인이 자신의 노동환경, 삶의 시간, 부부생활, 가족, 자연환경과 관련해 이제 더 이상 소외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 그러므로 질서자유주의자들이 꿈꾸는 기업사회란 시장을 위한 사회이자 시장에 대항하는 사회입니다. 시장을 향하도록 만들어진 사회이자 시장에 의해 야기되는 가치나 생활에 관련된 효과들을 벌충하는 사회인 샘이죠.

<같은책, p.336>

자본의 17가지 모순

자본의 17가지 모순

생산과 실현 간의 모순에 다리를 놓는 두 번째 방법은 가격을 터무니없이 올리거나, 노동계급에게 수수료/지대/세금을 부과하여 재량소득과 생활수준을 상당히 하락시킴으로써 노동자들이 손에 넣은 잉여분을 다만 얼마라도 빼앗는 것이다. 이는 사회임금을 조작하여 연금권, 교육 및 의료공급, 기본적인 서비스에서 얻은 성과들이 탈취에 의한 축적이라는 정치 프로그램의 일환으로 퇴행하는 과정에서도 가능하다. 오늘날 국가가 긴축의 정치에 폭넓게 호소하여 얻고자 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생산의 지점에서 자본은 노동자의 요구에 밀리거나 양보할 수도 있지만 생활공간에서 노동자의 주머니를 털어 양보하거나 잃었던 것(그리고 그 이상)을 되찾을 수 있다. 수많은 약탈적인 관행, 임의적이고 역진적인 세금, 과도한 법무 수수료 등 때문에 크게 골머리를 앓지 않더라도 이미 취약한 인구계층에게는 높은 지대와 주택비용, 신용카드회사/은행/전화회사의 과다청구, 의료와 교육의 사유화, 사용자 수수료와 벌금의 징수 등이 모두 힘겨운 재정적 부담이다.

<데이비드 하비 – 자본의 17가지 모순, 일곱번째 모순: 생산과 실현의 모순적 통합 p.143>

 

개별 이익을 추구하는 은행가들이 일반 복지에 기여하지 않았던 것이 분명해졌고, 미국에서는 연방준비은행이 민중이 아닌 은행들을 구제해 주었다. 이로써 이제 독점권력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경제학자들이 말하는 ‘지대 추구’에서 비롯된 시스템상의 문제임을 인정하는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경제학자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쁘게 말하면 부자가 되는 데는 두 가지 방법이 있는데, 하나는 부를 만들어 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의 부를 빼앗는 것이다. 전자는 사회에 이롭지만 후자는 해가 되는데, 부를 빼앗는 과정에서 부가 파괴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지대 추구는 내가 말하는 ‘탈취에 의한 축적’을 예의 바르고 다소 중립적으로 표현한 것일 뿐이다.

<같은 책, 열 번째 모순: 독점과 경쟁- 집중과 분산 p.205>

 

일부 집단에서는 자본주의가 무시무시한 환경위기라는 형태의 치명적인 모순에 직면했다는 생각을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나는 이 주장이 그럴싸하긴 하지만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자본의 기하급수적인 성장 떄문에 환경에 대한 압력이 누적되고 있다는 사실에 비추어 볼 때 이 주장은 대체로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이 주장에 대해서는 크게 네 가지 이유에서 문제를 제기할 수 있다.

첫째, 자본은 오랜 역사 동안 생태적 난국을 성공적으로 헤쳐왔다. …자본의 역사를 거치는 내내 너무나도 많은 절망의 예언가들이 아직 무르익지도 않았을 때 너무나도 빨리 그리고 쓸데없이 자주 “늑대야”라고 소리쳤다. … 둘째, 우리가 소위 착취하고 고갈시키고 있는 ‘자연’, 이 떄문에 우리를 구속하고 심지어는 ‘복수를 한다’고까지 여기는 ‘자연’은 사실상 자본순환과 자본축적에 내부화되어 있다. 가령 식물의 성장 능력은 이윤을 추구하는 기업형 농업에 통합되어 있기 떄문에 이 이윤을 재투자해야만 이 식물은 그 다음해에도 다시 성장할 수 있다. … 세 번째 지점은 자본이 환경 문제를 큰 사업 영역으로 전환시켰다는 점이다. 환경기술은 요즘 세계주식시장에서 고가에 거래된다. …앨 고어가 지구온난화와 관련된 실천을 모색하다가 결국 환경운동에 남긴 큰 선물은 새로운 탄소거래시장을 탄생시킨 것이었다. 이 탄소거래시장은 헤지펀드가 투기의 성과를 올릴 수 있는 거대한 공급지가 되었을 뿐 전 세계 총탄소배출량을 억제하는 데는 거의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있다. … 넷째, 어쩌면 가장 불편할지도 모르는 지점인데, 자본은 환경 재난이 한창일 떄도 완벽하게 꾸준히 순환하고 축적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같은 책, 열여섯 번째 모순: 자본과 자연의 관계 p.360-362>

 

중요한 것은 자본이 생존을 위해 발버둥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비용 때문에 인구 다수가 극악무도한 상황에 처하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디스토피아라고 해도 아직은 이쪽에서 찔끔찔끔 무인기 공격을 감행하고 저쪽에서 정신 나간 통치자들이 자신들의 국민을 상대로 가끔씩 독가스를 사용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는 것도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환경파괴와 대량 기아 사태에 대한 저항의 모든 형태에 전혀 일관성 없는 살인적 정책을 시행하는 경우가 가끔 있긴 하지만, 아직은 세상 어디를 가나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다름없는 재앙에 가까운 전투가 봇물처럼 터져 나오지 않고 있다는 것도 희망이라면 희망이다. 부자와 빈자가 맞붙고 특권을 가진 자본가들과 비겁한 졸자들이 나머지 전체와 맞붙는 상황이 펼쳐지지 않았다는 것만도 희망이라면 희망인 것이다. 바라건대 사회/정치 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나 “이제 그만”이라고 외치며 우리가 살아가는 방식, 사랑하는 방식, 생존하고 재생산하는 방식을 바꿔 놓을지도 모른다.

<같은 책, 열일곱 번째 모순: 인간본성의 반란 – 보편적인 소외, p.384>

 

자본을 실현하는 데 무제한적으로 극대화된 효율성은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 무제한적으로 극대화된 비효율성과 무제한적으로 극대화된 낭비적 소비를 불러왔다. 필요, 바람, 욕구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졌다. 이전에 사용하던 것과 사용가치가 동일하거나 더 적지만 값이 더 비싼 상품에 대한 욕구를 만들어 내야 했다. 어떤 상황에도 굴하지 않는 필요의 긴박함에는 바람이 덧씌워져야 했다. 간단히 말해서 가장 수익성이 높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해 소비자를 창출하고, 수요를 만들어 내야 했다. 이를 위해 아무리 젖과 꿀이 흐르더라도 혁신과 노후화의 속도를 올리고 극심한 불평등을 재생산함으로써 새로운 형태의 희소성을 부단히 재생산해야 했다.

<앙드레 고르 – Critique of Economic Reason, p.22>

 

계몽된 휴머니즘의 전통이 아직 생생히 살아 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다시 인기를 얻고 있음을 보여 주는 신호들은 곳곳에 널려 있다. 전 세계 수많은 사람들이 불행한 이들의 삶의 기회와 전망을 향상시킨다는 사명을 앞세운 비정부기구나 자선기관에 몸담고 있는 것은 분명 휴머니즘의 발로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본에 휴머니즘의 옷을 입히려는 헛된 시도마저 진행 중이다. 일부 기업가들은 이를 깨어 있는 자본주의라고 부르기를 좋아하는데 보기에 따라서는 양심세탁이라는 의심을 사기에 충분한 기업주의 윤리의 일종이다. 그 자매품으로는 기업가의 비위를 적당히 맞추는 수준까지만 노동자 효율성을 향상시키자는 솔깃한 제안이 있다.

<데이비드 하비 – 자본의 17가지 모순, 결론: 행복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미래를 위하여, p.411>

 

전 세계 대중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정확한 표현대로 “무관심의 세계화”에 맞서, 파농의 재치 있는 표현처럼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겠다는 결심을 하고, 자신의 머리로 생각을 하면서, 무책임한 잠자는 숲속의 공주 놀이를 중단”해야 한다. 만약 잠자는 공주가 때맞춰 일어난다면 우리의 미래는 동화 속 결말에 가까워질 수도 있다. 그람시는 이렇게 말했다. “인간사의 절대적인 휴머니즘은 역사와 사회에 존재하는 기존 모순들의 평화로운 해결을 목적으로 삼지 않는다. 이는 다만 이런 모순들을 다루는 이론일 뿐이다.” 희망은 그 안에 숨어 있다고 브레히트는 말했다.

<같은 책, 결론: 행복하지만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미래를 위하여, p.425>

유동하는 공포

유동하는 공포

반복하건대, 유동적 근대의 모든 승리는 일시적이다. 그 승리가 가져오는 안전은 기껏해야 지금 힘의 균형이 유리하게 형성되었다는 의미일 뿐이며, 균형이란 언제나 오래가기 어려운 법이다. 마치 움직이는 물체를 찍은 스냅사진처럼, 오래 그 상태를 유지할 수 없는 법이다. 위험은 흙 속에 엎드려 있지만, 진정으로 굴복한 것은 아니고 언제까지나 굴복시킬 수도 없다. 그리고 덧없는 안전감이 기대는 유일한 근거인 힘의 균형은 매일처럼 확인될 필요가 있다.그래야만 아주 작은 변동의 조짐이라도 때맞춰 포착하고, 가능하면, 차단할 수 있을 테니까.

<지그문트 바우만 / 유동하는 공포, 1_죽음의 공포 85>

 

가장 파급력이 있으며 어쩌면 가장 문제가 되기도 하는 결과는 현대의 ‘신뢰성 위기’다. 악이 도처에 숨어 있음을 깨닫는 순간, 신뢰는 무너진다. 악인은 평범한 사람들에 비해 뚜렷이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두드러진 특징도 없고, 별도의 신분증을 가지고 있지도 않다. 그리고 지금 각자의 일을 하고 있는 모든 사람이, 사실은 악의 군단의 예비군으로서 언제든 그 군대에 현역으로 복무할 수 있는 사람들인 것이다. 물론 그런 시각은 대체로 과장이라 하겠다. 분명 모든 사람이 악의 종자로서 일할 수 있지는 않고, 일하려 하지도 않는다. … 하지만 누가 그런 사람인지, 또 누가 그렇지 않은 사람, 즉 악의 계략에 쉽게 넘어갈 수 있는 사람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다는게 요점이다.

<같은 책, 2_악과 공포 93>

 

당시 욥이 깨닫지 못했을지 모르는 것은, 이후 수백 년 동안 신처럼 전능하다고 뽐내는 자들 역시 자신의 무기를 가장 무시무시하고, 악랄하고, 강력하게 만들려면 그것을 예측 불능으로, 되는 대로 내리쳐야 함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 지배자의 벼락을 빼앗으려는 자는 먼저 그것을 둘러싸고 있는 불확실성의 안개를 걷어내야 하며, 그 불규칙성에서 규칙성을 찾아내야 한다는 것도. 그러나 당시 욥은 그것까지 내다보지는 못했다. 그는 근대인이 아니었으니까.

<같은 책, 2_악과 공포 100>

 

근대적 이성은 독점을 형성하고 권리의 배타성을 확보하는 데 특히 발빠르게 움직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것은 누군가에게 유리한 특권이 있을 때 그 특권에 따라 움직이는 규칙을 정하는 과정에서 가장 만족스럽게 작용했다. 그런 특건을 안전히 보장하려는 목적에서, 자기 자신을 위한 준칙이 적용되거나 제시되어 그들과 다른 류의 사람들을 배제하는데 쓰일 경우-그런 사람들이 무능하다거나 무가치하다거나 하는 관념을 빌미로, 그 밖에 편리하게 써먹을 수는 있지만 자명한 것으로 간주되고 논쟁을 허용하지 않는 여러 가지 이유를 끌어다 붙이며,- 근대적 이성은 별로 이의를 제기하는 것 같지 않다. 단지 적절히 고립되어 있고 철저히 외면받고 이는 소수의 강단 철학자들만이 불만을 토로할 뿐. 또한 ‘어떤 사람들은 괴로움을 당해도 괜찮다, 그것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 가능성을 줄이기 때문이다’라는 말이 외부에서, 때로는 내부에서 들릴 경우에도 이성은 저항하지 않았다. 즉 ‘우리’가 어떻게 하다 보니 ‘다른 사람들’이 희생하면 덜 불편하게 되는 입장에 있다면, 그런 희생에 대해 우리의 이성은 반대하지 않았다.

<같은 책, 2_악과 공포 110>

 

아우슈비츠나 굴락, 히로시마의 도덕적 교훈 중 가장 충격적인 것은 우리가 철조망 안에 갇히거나 가스실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다.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가스실의 경비를 서고, 그 굴뚝에 독극물을 넣는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머리 위에 원자폭탄이 떨어질 수 있다는 것이 아니라, ‘적당한 조건이라면’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머리 위에 그 것을 떨어트릴 수 있다는 것이다.

<같은 책, 2_악과 공포 112>

 

유동적 근대를 살며,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 확실하고 믿을 수 있는 관계를 갈망한다. 대부분의 인간관계가 오히려 불안만 양산하고 있지만 말이다. 의심을 거둘 수 없고, 상대가 혹 배신할까봐 마음을 놓을 수 없고, 불안에서 벗어날 수 없는 우리들. 그런 이유로 우리는 더 넓은 친구와 동지 관계의 네트워크 형성에 급급해한다. 저마다 휴대폰의 주소록에 갈수록 더 많은 네트워크를 구축해 나가려 하기에, 휴대폰 새 모델이 나올 때마다 전보다 커진 주소록 공간을 갖추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저마다 배신에 대비해 ‘양다리를 걸치는’ 수법으로 리스크를 줄이려 하는데, 그것은 결국 리스크를 더욱 키우며 배신을 평범화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하나의 바구니로는 안심이 안되기 때문에, 새 바구니가 보일 때마다 달걀을 나눠 담으려 애쓰는 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같은 책, 2_악과공포 118>

 

실존적 전율에 대한 국가적 방어책이 곧 철폐될 전망이고, 집단적인 방어장치들-가령 노동조합 등 집단협상을 위한 수단-도 약자의 연대를 침식해 들어오는 경쟁 시장의 압력에 굴복할 것으로 보이므로, 이제 개인에게 남은 것은 자신을 위해 사회적으로는 문제가 있는 수단을 찾고, 실행하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을 개인이, 개인에 의해, 개인을 위해 해야만 한다. 수단이라고는 개인적으로 소유하고 운용하는 수단뿐인데, 목적을 달성하기에는 턱없이 함량 미달인 수단이다. 이미 견딜 수 없을 만큼 불안이 고조된 환경의 유일한 해결책으로 더 많은 유연성을 주문하는 정치권의 메시지는 더 많은 도전과 더 큰 ‘사회문제의 개인화’가 초래된다는 점, 궁극적으로 더 심각한 불확실성이 찾아오리라는 점을 호도하는 것이다. 정치가들은 실존적 전율에 대한 집단적 대응 가능성을 철저히 외면하며, 그 대신 갈수록 불확실하고 예측 불가능해지는, 또 잠재적 위협이 커져만 가는 세계에서 개인의 안전에 주력하라고 부추긴다.

<같은 책, 5_유동적 공포 216>

냉소적 이성비판

냉소적 이성비판

존재는 지상에서 자기 자신 외에는 “찾아야 할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냉소주의가 지배하는 곳에서 사람들은 존재를 제외하고 다른 모든 것을 찾는다. 사람들은 ‘진정으로 살기’ 전에 늘 다른 일을 처리해야만 한다. 아직 하나의 전제 조건을 성취해야 하고, 잠정적으로 더 중요한 소망을 충족해야 하며, 셈을 지불해야 한다. 이 ‘아직, 아직, 아직’과 함께 무제한적인 생산 체계를 유지시키는 간접적인 삶, 연기의 구조가 생겨난다. 물론 이 구조는 늘 절대적으로 ‘선한 목표’처럼 보이게 할 줄 안다. 그것은 진정한 목적인 것처럼 도깨비불로 우리를 유인하지만, 가까이 다가가면 다시 멀리 사라진다.

<페터슬로터다이크, 냉소적 이성비판, 32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