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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2009/07/05 글쓰기는 삶이다 -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12)

꿈의 자본주의

두가지 생각이 대립한다.

첫째, 나는 내 존재 전체를 자본이 요구하는 하나의 기능과 맞바꾸고 싶지 않다. 전문가. 나쁘지 않다. 그러나 이 '전문가' 자격을 위해 지금 회사는 나에게 너무 많은 것들을 희생하길 요구한다. 늦은 밤 야근, 주말 출근, 정해져 있지 않은 스케쥴, 스트레스, 이런 것들이 생업이라는 틀을 넘어 나머지 내 삶 전체 영역을 침식하고 갉아먹고 지배한다. 적정한 수준의 투자가 아니라, 삶 전체를 거기에 쏟아 부을 것을 요구한다. 생업은 생업이 아니라 생 자체가 되어버린다. 나는 컨설턴트이기 이전에 인간이고, 주말에는 만나야 할 친구들이 있으며, 평일 저녁에는 읽어야 할 책들과 써야할 글들이 있다.

둘째, 삶이란 성취다. 어떤 위대한 일을 해내기 위해서는 남다른 노력과 열망이 필요하다. 성공은 노력과 기다림, 희생 없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지금 약간의 불만과 희생은 성취를 위한 투자일 뿐이다. 삶은 무한한 경쟁이며, 이 경쟁에서 승리한 사람만이 성취를 거머쥘 수 있다. 꿈, 도전, 열정을 갖고 절실히 원하며 간절하게 매진해도 성공을 보장할 수 있을까 말까다. 어느 한 분야에 미친듯이 골몰해야만 한다고 강조하는 수 많은 서점의 자기계발서들을 보라. 그 글들은 진실을 담고 있다. 진정한 노력없이 남다른 성공을 기대하는 것은 자기기만이다.

이 두 부류의 반대되는 생각은 아직도 오락가락하며 나를 일터에서 이랬다 저랬다-뺑기를 부렸다 열심히 하게했다-하게 만들지만, 거기에 한가지 사실이 더 더해져 나를 극도로 혼란스럽게 한다. 그것은 내가 삶에서 진정으로 하고자 원하는 것, 실현되어야 할 자아의 가치가 자본주의적 교환가치에 있지 않다는 사실이다. 자본주의 내에서 자기가 하고자 하는 바를 찾아서 거기에 맞춰갈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꿈이 기업가인 사람은 얼마나 행복한가. 수 많은 아이디어를 연구하고, 회사에서 배워나가면서 의심없이 매진하면 된다. 꿈이 예술가인 사람은 고민한다. 전업작가는 이야기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는 기업가의 목표와는 달라야 한다. 만들어지는 이야기의 제1 가치가 기업가가 추구하는 이윤이나, 교환가치가 되어서는 안된다. 오히려 상업성이 결부되면 예술은 이상한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하므로, 독립성을 지키기 위해서는 예술은 돈으로 교환될 수 있는 상품성과는 오히려 최대한 멀리해야 한다. 팔기 위한 놀이는 더 이상 놀이가 아니다.

여기에 모순이 생긴다. 누구 말대로 기타를 치려면 엄지가 터지고 공부를 하려면 머리가 터지고 노래를 하려면 목이 터진다. 그런데 이 터짐에는 돈이 되는 것들과 되지 않는 것들이 있다. 수 많은 사람들은 사실 돈이 되지 않는 터짐을 자신의 잠재적 꿈으로 지니고 있다. 그런데 운 좋게 엄지가 터져 기타를 치는 것으로 생업을 유지할 수 있게 된 사람들도 그 행위를 '팔기 위한 것'이라 말하면 싫어할 것이다. 게중에는 서태지와 같이 F.M Business 같은 곡을 부르며 ("너와 나는 왜 도대체 어떤 목적에 여기서 마주보며 노래를 흥정하는거야") 알면서 짐짓 자기는 아니라는 듯이 자신의 순수함을 믿어달라는 장사꾼들도 있다. 게중에는 공지영처럼 책을 쓰는 것이 "먹고 살기 위한 것임"을 순순히 인정하면서도, 그저 금밖에 서 있었던 노동운동의 경험을 자신의 이야기로 지어 파는 작가들도 있다. 나는, 연민을 느낄 수 밖에 없다. 왜냐하면 이들이 자신의 예술을 먹고 사는 문제를 떠나 조금 더 순수하고 솔직하게 대할 수 있었다면, 진짜 자기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안타까움이다. 그리고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돈이 되지 않는 터짐을 무시하고 자본이 요구하는 곳으로, 경제 시스템이 필요로 하는 곳으로 자신의 삶을 맞춰가며 심지어는 자신의 꿈을 개조하기 까지 한다.

내 꿈은 분명히 자본주의적 구조 밖에 있다. 그건 지금껏 세상에 없었던, 새로운 형태의 이야기를 만드는 일이다(물론 지금 말하기는 부끄럽다. 나는 꽤 동떨어져 있으므로.). 운이 좋으면 상품화 될 수 있을 수도 있지만, 가능하면 나의 순수한 놀이로 그쳤으면 한다. 오히려 지금 당장 상품화 되지 않아도 언젠가 내가 죽고 이 땅에서 사라지더라도 두고두고 사람들에게 읽힐 수 있는, 단 한권의 책. (개인적으로 유전자를 후세에 전하려는 생물학적 본능이 지식과 정보의 수혜를 입어 이러한 꿈이 되었다 생각한다. 이 또한 권력의지이고, 강력한 삶의 에너지일 것이다.) 이건 꿈이다. 그러나 이 꿈은 실현되더라도 나의 경제적인 삶을 해결해 주지 않는다. 내 문제는 잠재적으로 생업과 예술활동을 분리하려는 것에서 출발하며, 생업은 절대적으로 내 창조적 에너지를 갉아먹지 않는 수준에서 그쳐야 한다. 그렇기에 나는 '성공'할 수 없을 것이다. 두번째 부류의 생각대로, 어떤 꿈이든 그것을 실현하는데는 많은 것들을 포기해야만 한다. 이 경우에는 돈/안정된 생활과 같은 기본적인 사회적 성공이다.

과연 절충적인 대안은 없는 것일까. 예술적 성취를 위해서 사회적 성취를 포기하거나, 사회적 성취를 위해서 예술적 성취를 포기하거나, 삶은 이 두개의 영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고 어느한쪽을 선택해야 하는 것일까. 사회적 성취를 일단 포기하고 예술을 통해 결국 두 가지를 다 얻는데 성공한 일부 예술가들은 나를 비웃을 것이다("너는 바보다. 두 가지 성공은 일치될 수 있는 것이다."). 사회적 성취를 포기하고 자기 예술의 길을 가는 수 많은 예술가들도 마찬가지로 나를 비웃을 것이다("너는 비겁하다. 너는 꿈에 절실하지 못하고 안전한 곳에서 꿈이란 이름의 겉멋을 부리려고 했을 뿐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본이 제시하는 적당한 꿈을 가지고 교환가치에 매진해 사회적 성취를 이룬 사람들도 나를 비웃을 것이다("너는 미쳤다. 교환가치가 없는 꿈은 기껏해야 취미생활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 부류의 사람이 나를 비웃을 때 나는 그들에게 무엇이라 반론을 해야 하나. 그렇게 서성거리기만 하는 내가 우스웠는지 삶이 나에게 어떻게 할지 지금 당장 선택하라 한다.

2009/07/26 15:56 2009/07/26 1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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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차원적 농담 2009/07/26 15:56
 

밀란쿤데라, '느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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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림을 상실한 현대적 세태에 대한 가벼운 농담
나는 평소 지나치게 진지한체 하며 살기 때문에, 농담을 잘 하는 사람을 좋아한다. 농담을 하기 위해서는 현실을 궤뚫어 보는 정확한 현실인식과 그것을 비꼴 수 있는 재치있는 여유가 동시에 필요하다. 물론 모든 작가들은 어느 정도는 농담의 재능을 타고 났거나 끝없는 노력을 통해 남다른 농담력(力)을 계발했기 때문에 작가가 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일군의 작가들 중에서도 비교할 수 없이 빼어난 농담꾼들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나 샐린저, 마르케스, 그리고 밀란 쿤데라가 그런 '꾼' 작가들의 예이다. (작가는 아니지만, 마르크스도 이들에 지지않는 재기발랄한 농담꾼이다.)

그중에서도 쿤데라는 '농담' 이라는 제목의 소설을 쓰기도 했을 정도로, 그에게 있어 농담은 하나의 큰 주제이다. '느림' 또한 마찬가지로, 이 소설에는 베르크나 퐁트벵 같은 등장인물의 '일차원적' 농담과 더불어, 사건을 서술하는 화자가 쉬지않고 농담조의 말을 내뱉는다. 소설을 읽으면서 웃는다는 것은 생경한 경험일지 모르겠지만, 나는 정말로 이 책을 보면서 '일차원적 의미로' 웃었다.

퐁트벵에 의하면, 오늘의 모든 정치가들이 어느 정도는 다 춤꾼들이요, 모든 춤꾼들이 또 정치에 관여하고 있는데,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그들을 서로 혼동해서는 안 된다. 춤꾼이 여느 정치가와 다른 것은 그가 권력이 아니라 명예를 갈구한다는 점이다. 그는 이 세상에 이런 저런 사회조직을 부과하고자 하는 게 아니라 (그는 이를 전혀 개의치 않는다) 자신의 자아를 빛내기 위해 무대를 차지하고자 한다.

무대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들을 무대에서 몰아내야 한다. 이는 특별한 전투 기술을 전제로 한다. 춤꾼이 행하는 전투, 퐁트벵은 그것을 <도덕씨름>이라 부른다. ...(중략)... "당신은 소말리아의 어린이들을 위해 당신의 3월달 봉급을 (나처럼) 즉각 포기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까?" 깜짝 놀란, 그 사람들에겐 두 가지 가능성만 남아 있을 뿐이다. 이를 거부하며 아이들의 적으로서 스스로의 명예를 실추시키든가, 그렇지 않으면 마치 에이즈 환자들과 점심식사가 끝날 무렵 저 가엾은 베르크의 망설임들을 보여주었듯 카메라가 악의적으로 보여줄 게 분명한 그 끔찍한 당혹 안에서 "예"라고 말하거나.

소설은 크게 두가지 주제가 변주되며 진행된다. 하나는 제목대로 '느림'이라는 쾌락을 잃어버린 현대의 인스턴트적이고 빠르기만한 풍속에 대한 비판(너 하고싶어? 나도 하고싶어!)이며, 하나는 대중을 선동하는 춤꾼과 같은 권력과 그에 영합하는 즉물적인 대중(미디어는 숙고를 허용치 않으며, 대중도 보이는 것을 받아들일 뿐 진중하게 춤꾼을 판별하려 들지 않는다!)에 대한 비판이다. 두 주제를 '기계, 미디어와 같은 기술 발달이 가져오는, 인스턴트적인 현대성의 희화화된 비극'이라는 공통주제로 모을 수도 있겠지만, 그냥 쿤데라의 두 가지 농담으로 보는 편이 좋을 것 같다. 쿤데라는 소설의 구조 따위를 크게 고려하지 않고, 단편소설을 쓰듯이 두 개의 소품적 주제를 하나의 이야기로 엮어놓았을 뿐이다.

비방 드농의 단편소설이 전하는 이야기는 이렇다. 스무살의 한 귀족이 어느 날 저녁 극장에 있다.(이름도 작위도 언급되지 않았으나 나는 그를 기사로 상상한다.). 그는 옆자리의 웬 부인을 본다(소설은 그녀의 이름 첫 글자만 제공한다-T부인). 이 부인은 그 기사를 정부로 둔 백작부인의 여자친구이다. 그녀는 그에게 공연이 끝난 뒤 자기를 바래다 달라고 요청한다. ..(중략)...이때부터 그들의 밤이 시작된다. 3막극으로 구성된 하룻밤. 먼저, 그들은 정원을 산책한다. 그 다음, 정자에서 정사를 나눈다. 마지막으로, 성의 한 밀실에서 사랑을 계속한다.

이른 새벽, 그들은 헤어진다. 복도들의 미로속에서 자기 방을 찾지 못하자, 기사는 정원으로 되돌아 가는데, 놀랍게도 거기서 그는 후작, T부인의 정부로 알고 있는 그 후작과 마주친다. 이제 막 성에 당도한 후작이 유쾌하게 인사를 건네며 이 신비스런 초대의 이유를 알려준다. T부인은 그, 즉 후작이 남편에게 의심받지 않도록 어떤 방패막이가 필요했다는 것. 이 속임수가 성공한 것을 기뻐하며, 그는 가짜 정부라는 매우 우스꽝스런 임무를 수행해야만 했던 기사를 조롱한다. 그 기사, 사랑의 하룻밤에 지친 그는, 후작이 감사의 뜻으로 제공한 마차를 타고 파리로 다시 떠난다.

농담의 절정은 이렇다. 18C에 발표된 단편 소설의 이야기를 단지 현대성에 대비되는 느림의 미학을 상징하는 것 처럼 차용하던 쿤데라는, 말미에 이 기사를 소설의 주인공(?)격이라 할 수 있는 등장인물과 직접 만나게 한다. 두 주인공의 조우는 아이러니 하다. 18C 소설에 등장한 기사는 치정에 얽혀 후작에게 조소당한 끝에 그가 제공한 '마차'를 타고, 20C 현대를 사는 주인공 벵상은 짧은 하룻밤의 정사에 실패하고 '오토바이'를 타러간다. 만남은 극적인 곳에서 이루어지지만, 그들은 서로 보고 지나칠 뿐 교류하지 못한다.

"느림"과 "기억" 사이, "빠름"과 "망각" 사이에는 묘한 관계가 있다. 우리는 확실히, 걷다가 무언가가 생각나지 않을 때, 곰곰히 옛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발걸음을 멈춘다'. 그러나 어떤 무언가에서 벗어나고자 하거나 잊어버리고자 할 때, 우리는 고개를 앞으로 숙이며 '더욱 빨리 걷는다'. 현대성, 기계의 발명, 미디어, 이 모든 것은 삶의 속도를 더욱 빠르게만 해왔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곳곳에서 18C의 기사를, 느림의 미학을 간직한 비방 드농의 기사를 만나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지나치며 현재를 잃어간다. 속도의 엑스터시, 기억을 잃어버린 망각의 길 위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린다.

그렇지만, 농담이다. 그래도 우리는 잘 살고 있잖는가.

2009/07/14 23:09 2009/07/14 2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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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 디스렉시아 2009/07/14 23:09
 

글쓰기는 삶이다 - 이만교의 '글쓰기 공작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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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 공작소'라는 제목만 본다면 시중에 차고 넘치는 소설작법/글쓰기 매뉴얼 정도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은 그 자체로 '글쓰기' 행위를 소재로 한 완성된 수필이기도 하다. 단순한 매뉴얼이라고 하기에는 저자 스스로 말하는 '씨앗문장'이 될 문장들이 너무나 많다. 씨앗문장은 독자를 자극하고 독자 스스로 글을 쓰는데 영감을 줄 명문장들을 말한다. 어찌보면 당연하다. '재미있고 영감을 주는 글쓰기'를 소재로 써진 글이 정작 재미가 없고 영감을 주지 못한다면 아이러니라 하겠다. (그런데 시중에 나온 대부분의 글쓰기 관련 책들은 그 아이러니를 실현한다.)

몇 가지만 뽑아보겠다.

그리하여 육체적 욕망만 가득하면서 사랑에 빠졌다고 표현하는 젊은이는 얼마나 깜찍한지, 권력과 재물을 중시하는 신앙에 빠져 있으면서 자신이 믿는 종교야말로 위대하다고 주장하는 종교인은 얼마나 요지경인지, 자기 잇속을 챙기고 싶을 때마다 친절을 사용하는 버릇을 갖고 사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귀여운지, 또한 구체적인 노력은 하지 않으면서 "나는 평범한 회사원이 아니라 문학을 해야 했을 사람인데"하면서 회사를 다니는 사람을 보면 얼마나 마음이 느긋해지는지!...(중략)...꿈과 현실이 다를 수는 있지만 분리될 수는 없다. 가령 사진작가를 꿈꾸는 샐러리맨이 있다면 그는 틈나는 대로 사진과 관련된 정보를 탐색할 것이다. 인터넷을 뒤져 보고 동호회에 가입하고 강의를 들어 보는 것은 물론, 무수한 사진을 직접 찍고 현상해 볼 것이다. 그리고 마침내 전시회를 열고자 애쓸 것이다. 만약 동호회에 가입하는 정도에서 머문다면 그는 엄밀히 말해 '사진작가'를 꿈꾼 것이 아니라 '사진작가를 꿈꾼다면서 동호회 활동으로 만족하는 사람'을 꿈꾼 것에 불과하다.

책 첫머리에 글쓰기와 꿈에 대해 언급하면서, '모양만 꿈'을 꾸는 사람들을 비판하는 글의 일부다. 그는 모든 사람들의 꿈은 이미 현실태로 이루어졌다고 말한다. 그의 비판을 따른다면 나의 꿈은 '작가지망생'이 아니라 '안정적 재정과 현실이 아쉬워 월급쟁이 생활을 계속하면서, 말만 문학에도 관심과 소양이 있는양 하는 샐러리맨'이다. 그의말대로 진정한 절실함으로 행동이 수반되지 않는다면, 실제 꿈을 꾸는 사람이 아니라, 포즈를 취하는 사람이다.

좋은 글을 쓰려고 강의를 듣는 학생과 선생이 함께 해야 할 가장 첫번째 작업은 바로 기존 글쓰기 강의 관습으로 부터 탈피하는 일이다. 이제까지의 글쓰기 통념으로부터 벗어나, 우리에게 맞는 글쓰기 강의 방식과 강의실 분위기를 창작해야 한다. 좋은 글을 쓰기 위한 우리의 첫번째 과제는 기존 강의의 관습과 통념을 넘는 강의 방식을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더듬어, 우리 스스로 '창작'하는 일이다.

많은 글쓰기 강의가 플롯/인물/구성 같은 평단의 작품 사후 해체적인 분석을 바탕으로 인습적으로 이루어진다. 이런 것들은 분명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글쓰기의 핵심은 아니다. 글쓰기가 진정 창조적인 작업이라면, 강의 방식부터 새롭게 '창작' 되어야 한다.

자유롭고 풍요로운 자기 신명으로 살지 못하고 권력이나 대리자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그래서 세속적 위계질서와 잣대로서 열등감 혹은 우월감에 시달리는 약자들을 보면, 그들에게 스스로 반성하고 성찰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라도, 그리고 약간은 벌을 주는 기분으로, 다만 방치해 두고 싶은 마음이 들기까지 한다. 강자는, 진리를 단지 알고 있는 자가 아니라 좋아하고 즐기는 자여서, 자신보다 진리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는 자들을 보면 참으로 측은하게 바라볼 수 밖에 없다.
글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감상적/도식적/윤리적/일상적/상투적/통념적 언어질서에 복종하는 글쓰기는 약자의 글쓰기다. 반면 스스로의 감각과 사유와 상상을 생성해 내고 즐기며 기성문법을 넘어서는 새롭고 낯선 소수언어를 만드는 자가 비로소 작가고 예술가다. 그런점에서 글쓰기란 언제나 소수언어로서의 창작언어를 탄생시키는 일이다. 창작언어를 탄생시키는 일이란, 기성질서와 언어에 저항하고, 기성질서와 언어를 전복하고, 무엇보다 기성질서와 언어보다 더 강해지고 넉넉해진다는 뜻이다. 그런 점에서 창작언어는 자연스레 글쓴이의 개성이 묻어나는 언어이고 저항의 언어이고 전복의 언어이고 강자의 언어이고 난장의 언어다.

스타일은 결국 개개인이 개개인의 것으로 새롭게 창조해야 하는 것이다. 글을 쓴다면 기존언어/상투적인 관념/관습화된 비유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관점을 드러낼 수 있어야 한다. 따라서 글은 단순한 기록행위가 아니라 사유, 그리고 삶 자체와 연결되어있다. 도덕적 정직이 아니라 개개인의 실질적인 정직을 드러내는 일이다. 글에 솔직하다면 삶이 변화할 것이고, 삶이 변화하면 글이 따를 것이다.

물론 이책은 글쓰기와 관련된 작자의 깊은 사유 뿐만 아니라, 기존의 글쓰기 매뉴얼처럼 기술적으로도 풍부한 내용들을 담고 있다. 작가지망생들 뿐만 아니라, 글을 쓰고자 하는 누구에게나 글쓰기의 핵심과 글을 쓰는데 필요한 기본기를 적절히 전달해 줄 수 있는 책이다.

2009/07/05 21:35 2009/07/0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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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퍼 디스렉시아 2009/07/05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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