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원조가 사랑에 미치는 악영향에 관하여
오랜만에 글.
예를들어 내가 어딘가의 국제구호단체를 통해 어느 아프리카 난민에게 월 2만원의 돈을 원조하기로 했다고 생각해보자. 비록 큰 돈은 아니지만, 그 돈은 콩고의 어느 작은 도시에 사는 쿠우-작명센스는 기대하지마라-라는 흑인아이가 한달간 먹을 식량과 입을 옷 정도는 되어 주었다. 나는 월 2만원씩을 꼬박꼬박 그 아이에게 보내주었다. 쿠우는 갑작스런 행운으로 먹을것과 입을것에 대한 걱정을 한동안 하지 않고 살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한 5년쯤이 지난 어느날, 나는 갑자기 이직과 결혼 등 나 자신의 삶에 휩쓸려 무심코 그 원조를 그만두기로 했다. 쿠우는 매달 들어오는 그 2만원의 돈에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여전히 처절하게 의존하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노력해도 사회구조상 스스로 자급자족을 할 수 있을만한 지위에 오르지는 못했다.) 그 돈이 갑자기 들어오지 않게 된 것은 그에게 날벼락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쿠우는 어떤 생각을 할까. 어쨌든 그때까지 받은 지원만 해도 뜻밖의 행운이었으므로 그저 감사하게 생각하고 다시 곤궁한 생활을 받아들일까, 아니면 갑작스레 지원을 중단해 버린 나를
원망할까.
쿠우가 나를 원망한다면 그건 분명 논리적으로 잘못된 것이다. 애초에 내가 아무런 인도주의적 지원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그는 내내 빈궁한 생활을 해야만 했을 것이다. 그나마 5년동안이라도 나는 쿠우의 걱정없고 행복한 삶을 도왔으므로, 감사받아 마땅해야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심정적으로-그러나 논리만큼이나 동등한 자격을갖고- 나를 비난할 수 있을 것이다. 자기가 끝까지 책임질 수 없는 친절은 왜 보였느냐고. (비슷헤가는 그러게 기르지도 못할 고양이는 왜 주워왔니. 결국 버릴거면서. 사람 손탄 고양이는 야생에 못산다 쯔쯔. 등등등) 나는 그 비난 앞에서 적어도 당당하게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앉아 있지는 못할 것이다. 미안할 것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이런일은 국제적 규모의 인도주의적 실천영역에서만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관계의 미시적 세계에서도 사람이 무언가를 주고 받고 의존하는 바는 똑같다. 뜻밖의 친절-혹은 호의, 연민, 사랑, 어떠한 긍정적 감정이든 간에-을 받다가, 그것을 상실했을 때에 '지금껏 잘해줘서 고맙습니다' 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과연 몇이나 될까? 연애관계에서 수 많은 이별이(쿠우의 입장에서의 이별이다.) 아름답게 남지 못하고 좌절과 원망으로 점철되는 이유. 연애관계에서만 그렇다고 믿는다면 순진한 축이다. 심지어는 사랑(戀)이 아닌 곳에서도 이런 현상들은 나타난다. 사람이 사람을 상실하는 것, 잃어버리는 그 모든 때에. 사람은 자기에게 주어지는 것이 있다면 어느 순간 그것을 '자기 것'으로 여기게 되고, 그것을 상실했을 때 깊게 상처받는 묘한 동물이다. 그것을 단순히 소유욕이라고만 비난할 수 있을까.
현대의 삶은 풍요한 난민들을 만들어 냈다. 사람들은 감정적으로 더욱 메말랐고 과거보다 많은 의존을 한다. 그 와중에 나는 난민들의 섬 한가운데서 나의 추함에 대면한다. 그 추함이란 상실, 아픔, 작고 사소한 상처들을 준 사람들에게로 쏟아내는, 아프리카 어느 아이의 철없는 증오다. 사랑하지 않으면서 질투하고 기대하지 않으면서 실망하는, 이 비논리적인 마음들은 다 어디서 온 것들인가. 쿨하게 '그간 잘해줘서 고맙습니다'를 외치지 못하고 심정적 비난을 일삼는 나는 참, 추하다. 그러나 또한 한편으로 진정한 관계가 존재할까 하는 의문. 어느 한쪽이 어느 한쪽을 원조하지 않는, 어느한쪽이 어느한쪽에 의존하지 않는, 그러면서도 결코 혼자서도 괜찮다는 생각을 하지 않고 소통을 유지하며 더불어 살아가는, 그런 관계는 존재할 수 있나. 누군가는 코웃음 치며 그런건 없다고 잘라 말한다. 모든 관계는-특히 사랑은- 버티는거란다. 내가 멀쩡한 이 도시위에 슬픈 열대의 난민이 되어버린 것은 정말로 사람을 사랑(愛)하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풍요의 열쇠를 원한다.
사랑을 닮았지만 사랑이 아닌 것들
2009/08/1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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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석벙개님의 답글 죽인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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