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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1/27 오히토리사마, 드라마는 드라마답게. (7)
  2. 2010/01/14 앤디 워홀의 낙서가 비싼 이유 (8)

오히토리사마, 드라마는 드라마답게.

TBS 2009년 4분기 드라마, 독신(おひとりさま, 오히토리사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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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킥에 한참을 빠져있다가 정말 오랜만에 찾아본 일본드라마.
독신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아진 요즘이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일본에서는 30대가 될 때 까지 결혼에 골인하지 못한 여자들은 마케이누(負け犬,싸움에 진 개. 얼마전 TV에서 논란이 있었던 '루저'의 의미에 가깝다.)라 불렀다. 그런데 독신여성들이 늘어나고, 복잡한 결혼생활과 가정사에 치이지 않고 심플하게 자신의 삶을 즐기기 위해 적극적으로 독신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독신의 호칭이 마케이누에서 오히토리사마-おひとりさま, 높임접두어[お]+혼자[ひとり]+님[さま]. 일반적으로 음식점 종업원들이 혼자온 손님을 맞이할때 우리말로는 '혼자님입니까'라고 말하는데, 그 때의 '혼자님'이다.-로 변했다. 독신에 대한 존칭쯤 되겠다. 물론, 반어적으로 비꼬는 의미도 여전히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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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신녀 아키야마 사토미 역을 맡은 미즈키 아리사. 33살로 극 중에서도 실제 나이다. 5년전에 사귀던 남자로부터의 프로포즈를 결혼과 일의 병행이 어려울 것 같다는 이유로 거절한 이 후, 독신님이 되었다. 자신은 '결혼을 못 한 것이 아니라 안 한 것'이라고 말하는 입버릇이 사토미가 스스로 받는 사회적 압력과 컴플렉스를 보여주기도 한다. 결혼을 하지 않은 대신 사회적으로 성공했다. 척척 일을 잘 해내서 교사로서 촉망과 신임을 받고 빠른 나이에 학년주임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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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은 남자주인공 카미자카 신이치 역의 텟페이. 실제 직업은 무려 아이돌이지만 극중에서는 프리터를 막 벗어난 임시교사. 23살(실제나이도 동일)로 아키야마와는 10살 차이다. 드라마 스스로 말하는 대로 '초격차연애'다. 아키야마와 투 샷을 보면 묘하게 엄마와 아들 삘이 나기도 한다. 아키야마가 한창 유행하는 "오히토리사마"라면 카미자카 역시 지지않을 정도로 유행하고 있는 "초식계"다. 당당하게 제 삶을 살아가는 여자와 어딘가 유약한데가 있는 10살 연하 초식남 초격차연애. 미소년 초식남 답게 극 중 선생님 학생 가릴 것 없이 모든 여성의 사랑을 받는다. 남성판타지와 여성판타지를 동시에 자극하는 설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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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식상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신선하다고도 할 수는 없는 연상연하 커플 소재. 동경타워를 보면 친구 어머니와도 열애에 빠지는데 이 정도는 아직 준수하다. 그와 그녀의 주변인물들은 이 얼핏 불가능해 보이는 연애관계의 가능성에 처절히 관광당한다. 삼각관계, 짝사랑이 복잡하게 얽혀들지만 모두 패배하고 최후의 승리자는 이 두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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범죄의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신이다. 동정이라고 변명했지만, 아키야마는 카미자카의 아픔을 치유해주고 싶은 마음이 더 강했다. 표면적으로 본다면 이 백허그 한 번에 카미자카는 무너졌다. 그러나 모테모테(もてもて,인기있는)한 초식남으로서, 다른 여자들의 구애를 모두 뿌리친 것을 보면 그도 그 전 부터 마음이 있었던게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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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의 연애에 휘말리는 연쇄 피해자들. 친구인 케이타는, 카미자카를 좋아하는 키미코를 좋아한다. 케이타는 좋은 캐릭터다. 겉보기에 한심해보이지만 사랑에 있어서는 망설임없고, 과감하고, 정정당당하다. 카미자카에게 "니가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에, 돌아보지 조차 않는거야"라고 충고할 때 존재감이 빛났다. 그리고 어쨌든 염원대로, 전투에서 탈락한 키미코를 고구마로 G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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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만히 보면 이커플 진짜 민폐다. 역시 이 커플의 연애사에 휘말렸다 패가망신하는 맞선 남자 & 5년전 남자친구. 아키야마는 소회를 말한다. "카미자카를 만나고 나서 5년 분의 남자가 한꺼번에 몰려온 느낌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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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독신이 신경향으로 주목받는 것은 여전히 독신에 대한 사회적 압력이 존재함을 반증한다. 일상생활에서 조여드는 미시권력의 그물망을 자기나름대로 헤쳐나가는 아키야마. 그런 당당한 아키야마이기 때문에 혼자서 사는 것보다 더 불안하고, 더 큰 사회적 압력이 있을지도 모르는 연애를 감행할 용기를 냈을 것이다. 드라마는 '혼자임을 즐기며 산다'는게 '누군가와 함께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물론 유치한 장면도 많다. 아직도 전통적인 가족드라마로서의 관성-쉽게 동의할 수 없는, 편견에 가득한 교훈과 계몽주의적 설교-이 그대로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마지막까지 이 드라마를 재미있게 볼 수 있었던 것은 아예 그쪽 노선을 노골적으로 취하면서 드라마로서의 겸손을 지켰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판타지에 현실이 끼어드는 것을 싫어한다.

그리고, 빅뱅의 주제가가 좋았던 것도 한 몫.

2010/01/27 21:03 2010/01/27 21:03
youz
하이퍼 디스렉시아 2010/01/27 21:03
 

앤디 워홀의 낙서가 비싼 이유

소위 지식사회라 불리는 세상이 되어 생산수단은 개인과 더 강고히 결합하게 됐다. 과거 주요한 생산수단이 기계였던 산업사회에서 값비싼 기계들에 대한 자본가의 독점을 문제삼은 레닌이 생산수단의 공유화와 국유화를 외친지 얼마 되지도 않아, 현대 자본주의에서는 더 이상 불변자본과 가변자본을 명확히 나눌 수 조차 없는 문제가 생겨버렸다.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의 발달은 대체로 전 산업분야에서 고도의 집적자본들을 출현시켰다. '기계'는 싸졌고, '기계를 쓰는 방법'은 상대적으로 희귀해졌다. '숙련'이란 개념은 별다른 큰 주목없이 무시되었지만, 노동을 단순한 양적계산으로 환원할 수 없도록 만드는 현격한 차이를 불러왔다. 불변자본도 가변자본도 아닌 제3의 성격을 지닌 무언가-숙련, 지식, 경험과 같은 무형의 생산수단-가 노동과 결합한 탓에, 같은 환경 같은 재료 같은 시간이 주어졌을 때 누군가는 해낼 수 있고 누군가는 못해내는 차이가 생겨버렸다. 사람들은 똑똑하다. 무형의 생산수단이 교육을 통해 유전됨을 알기 때문에, 학원을 다니고 책을 읽고 인터넷을 뒤진다.

그런점에서 우리는 더이상 과거의 불쌍한 노동자들 처럼, 누구에게나 대체될 수 있는 단순한 노동력 상품은 아니다. 자본주의적 시스템과 생산공학은 여전히 개인의 개성과 차이를 배제하고 제품과 서비스 생산을 표준화하려고 노력하지만 그 시도는 대세와 자연을 부정하는 탓에 대개 실패한다. (표준화 컨설턴트들은 반성하기 바란다.) 다만 개인으로서 좋지 않은 점은 그만큼 모든 산업이 모든 노동자에게 일정 수준 이상의 발달된 숙련을 요구하는 탓에, 직업을 옮기기가 힘들다는 점이다.  현대는 노동이 상품화 되기 위해 자격을 요구하는 시대다. 그리고 물론, 그 자격을 얻기위한 최소한의 투자를 스스로의 경제력으로 소화하지 못해 자본이 처음 출판되던 19세기의 노동자 생활양식에서 한치도 벗어나지 못한, 불쌍하고 가난한 사람들도 존재한다. 사냥터에 들어가려고 칼도 빌리고 장비도 맞췄는데 레벨이 안되 몹을 잡지 못하는 현상이다. 물론 게임과는 달리 가난은 생존을 위협할만큼 치명적이다.

상품은 사용가치와 교환가치로 나뉘고, 특히 상품으로서 노동력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제 가격인 임금 이상의 노동을 할인하여 잉여가치를 창출하기 때문이다. 상품의 교환가치는 그 상품을 생산하는데 투입된, 사회적으로 합의된 총노동의 합이다. 맑스의 논리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그 논리는 시대의 변화와 함께 다음과 같은 이상한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한다. 만약 내가 쓴, 마치 발로 쓴 것 같은 이 궤변섞인 글을 어느 해외 버젓한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교수가 우연히 똑~같이 썼다고 가정해 보자. 두 글은 글자 수, 내용, 논리, 형식 모든 것이 같기 때문에 똑같은 사용가치를 가진다. 그러나 두 글이 상품으로 교환될 때는 사정이 달라진다. 어느 버젓한 대학 교수가 쓴 글은 내가 쓴 글보다 가치가 높다. 한마디로 더 비쌀 확률이 높다. 일반적으로 반백수 같은 나라는 노동력의 상품가치는 버젓한 교수라는 노동력의 상품가치보다 떨어진다. 도의적으로 하는 말이 아니라, 상품 속에 포함된 노동의 양이 교환가치를 결정한다는 맑스의 전제 위에서, '반백수표 노동력' 보다는 '버젓한 교수직표 노동력'을 얻기 까지 사회적으로 더 큰 노력(=노동)이 든다고 사람들이 판단하기 때문이다. 글이 상품이라는 전제에 동의하기만 한다면, 글 속에 포함된 사회적 노동량을 계산했을 때, 버젓한 교수의 글이 내 글보다 더 높은 교환가치를 갖게 되며, 이는 직관적으로 관찰되기도 한다. (앤디 워홀이 휘갈겨놓은 되도안한 낙서의 토나오는 가격을 보라.)

이쯤되면 노동력 상품에 따라붙는 이름표는 그 자체로 생산수단이 된다. '경력 몇년 차 숙련된 노동력입니다' 하는 수준에서 교환가치로서 연봉이 결정되는 경우는 소박하다. '저는 변호사 자격증이 있으니까 변호사 일을 할 수가 있어요' 와 같이 결합된 생산수단은 자체로 진입장벽으로 기능한다. 유명한 예술가가 피나는 노력 또는 운을 통해 손에넣은 그 유명함, 유명함을 통해 생겨나는 작품의 아우라도 이런 예의 일종이다. 생산 수단의 독점을 통해 자본가가 노동자에 비해 일방적 우위에 서있던 시대는 끝을 고했다.  다만 그렇게 끝난 시대는 모든 노동자가 일정한 생산수단을 소유하여 노동자 끼리의 세분화된 계급구별을 다시 만들어 냈으며, 프롤레타리아가 단결하여 해방되는 세상을 다른 방향으로 멀어지게 만들었다.

2010/01/14 20:29 2010/01/14 20:29
youz
일차원적 농담 2010/01/14 2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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